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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내일로와 함께한 특별한 독서 추억

p19 ...우리의 나아갈 길들이 확실치 않아서 우리는 일생동안 괴로워했다. 그대에게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생각해 보면 선택이란 어떤 것이든 무서운 것이다. 의무를 인도해 주지 않는 자유란 무서운 것이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낯설기만 한 고장에서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니, 사람은 저마다 거기서 '자신만의' 발견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 발견이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p23 평화로운 나날보다는, 나타나엘이여, 차라리 비장한 삶을 택하라. 나는 죽어서 잠드는 휴식 이외의 다른 휴식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만족시키지 못한 모든 욕망, 모든 에너지가 사후까지 살아남아서 나를 괴롭히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나는 내 속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이 땅 위에다가 다 표현한 다음 흡족한 마음으로 더 바랄 것 없이 완전하게 '절망하여' 죽기를 '희망'한다.

p28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마치 우리 앞에 놓인 찬물 가득한 이 유리잔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열병 환자가 손에 들고 마시기를 원하는 이 물 담긴 유리잔 말이다. 그가 단숨에 마셔버리는 한 잔의 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 감미로운 유리잔을 입술에서 떼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물은 그토록 시원하고, 그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신열 때문에 그토록 목이 타는 것이다.

p35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p45 나타나엘이여, 결코 과거의 물을 다시 맛보려고 탐내지 말라.
 나타나엘이여, 결코 미래 속에서 과거를 다시 찾으려 하지 말라. 각 순간에서 유별난 새로움을 포착하라. 그리고 그대의 기쁨들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말라. 차라리 준비되어 있는 곳에서 어떤 '다른' 기쁨이 그대 앞에 불쑥 내닫게 된다는 것을 알라.
 모든 행복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어서 그대가 길을 가다가 만나는 거지처럼 순간마다 그대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어찌하여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그대가 꿈꾸던 행복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해서 그대의 행복은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한다면-그리고 오직 그대의 원칙과 소망에 일치하는 행복만을 인정한다면 그대에게 불행이 있으리라.

p52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사색하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강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75 시간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 나는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언제나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선택이 내게는 고르는 것이라기보다는 고르지 않은 걸 버리는 것으로만 보였다. 시간이 좁다는 것과 시간이 하나의 차원밖에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끔찍한 마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폭이 널따란 어떤 것이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것은 한낱 선線에 지나지 않았고, 나의 욕망들은 그 선 위를 달리면서 어쩔 수 없이 서로 짓밟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것'아니면 '저것'밖에 할 수 없었다. 만약에 이것을 하면 곧 저것이 아쉬워져서 번번이 애타는 마음으로 두 팔을 벌린 채 아무것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잡으려고 팔을 웅크리면 무엇이든 '하나'밖에 잡히지 않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때부터 다른 많은 공부를 단념할 결심이 서질 않았기 때문에 무슨 공부든 한 가지를 오래 계속하지 못하는 것이 나의 일생의 과오가 되고 말았다. 무엇이든지 그러한 대가를 치러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은 너무 값비싸게 생각되었고, 이론으로 가득한 나의 고민은 해결될 수 없었다. 휘황찬란한 것들이 가득한 시장에 들어섰지만 쓸 수 있는 돈이라고는 (누구의 덕분인가?) 너무나 적은 액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쓸 수 있는 돈! 선택이란 영원히, 언제까지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는 걸 의미했다. 수많은 그 '다른 것들'이 어떠한 하나보다도 여전히 더 좋아 보였다.

p89 '바로 이 순간에 너는 생의 벅차고 온전하고 직접적인 감동을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그 밖의 것을 잊어버리지 않은 채? 네 사고의 습관이 너를 방해하고 있다. 너는 과거에 살고 미래에 살고 있어서 아무것도 자연 발생적으로 지각하지 못한다. 미르틸이여, 우리는 순간에 찍히는 사진과 같은 생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앞으로 올 것이 생겨나기도 전에 거기서 과거는 송두리째 죽어버린다. 순간들! 미르틸이여, 너는 알게 될 것이다. 순간들의 '현존'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진 것인가를! 왜냐하면 우리 생의 각 순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과 바꿔질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때로는 오직 그 순간에만 온 마음을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p119 꼭 다른 무엇인가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게 필요 불가결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떠나자는 것뿐이다. 아! 나타나엘이여, 없어도 되는 것들이 그 밖에도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의 유일하고 진정한 소유인 사랑, 기대, 그리고 희망으로 마침내 가득 찰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헐벗지 못하는 영혼들.

p189 아! 청춘-사람이 그것을 가지는 것은 한때뿐. 나머지 시간은 그것을 회상하는 것.

p202 내 책을 던져버려라. 이것은 인생과 대면하는 데서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자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라. 너 자신의 자세를 찾아라.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 하지 말라.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 말하지 말고-글로 쓸 수 있었을 것이라면 글로 쓰지 말라. 너 자신의 내면 이외의 그 어느 곳에도 있지 않은 것이라고 느껴지는 것에만 집착하고, 그리고 초조하게 혹은 참을성을 가지고 너 자신을 아! 존재들 중에서도 결코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하라.

p216 행복해질 필요가 없다고 굳게 믿을 수 있게 된 그날부터 내 마음속에 행복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된 그날부터. 이기주의를 곡괭이로 내리찍고 나자 곧 내 심장에서 기쁨이 어찌나 넘치도록 뿜어 나오는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 기쁨의 물을 마시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장 훌륭한 가르침은 모범으로 보이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나는 나의 행복을 천직으로 받아들였다.

p224 진정한 웅변은 웅변을 포기한다. 개인은 자기를 망각할 때 비로소 자기를 긍정한다. 자기 생각에 빠진 자는 자신의 방해물이 된다. 미인이 자기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 보다 더 내가 아름다움에 감탄해 본 적은 없다. 가장 감동적인 선線은 가장 체념한 상태의 선이다.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신이 되는 것은 스스로 신성을 포기함으로써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속에서 자기를 버림으로써 신은 창조된다.

p272 오! 우리가 하지 못한 모든 것, 그러나 우리가 할 수도 있었을 모든 것...하고 이승을 떠나려는 순간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했어야 마땅한 모든 것, 그러나 우리가 하지 못한 모든 것! 체면 걱정 때문에, 기회를 기다리다가, 게을러서, 그리고 "제길! 시간이 좀먹나." 하는 생각만 줄곧 하고 있다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매일 매일,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을 때 순간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결심, 노력, 포옹을 뒤로 미루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시간은 지나가 버리고 만다.
 오! 뒤에 올 그대는 보다 민첩해져서 순간을 놓치지 말라! 하고 그대들은 생각할 것이다.